마실 수도 없는 물이 담긴 삶을 backup





그가 떠나고.

내 곁에서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바뀌었다.


그가 혼자서 하던 일을
두 사람이
가끔은 세 사람이 나누어 했다.

그에게는 넘어가주었던 실수들을
그 사람들에게는 넘어가주지 않았다.

사소한 실수에도
사람들을 바꾸었고

나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실수에도
그들이 먼저 사과하며
스스로 떠나갔다.



한동안 먹지 않았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고

술기운에 웃을 때면
곁에 있던 친구들이

이제야 내 모습을 찾았다며
반가워해주었다.


“이게 너의 모습이야
그리고 이런 모습의 너라면
우리 곁에 있을 자격이 있어.“


그때는 술에 취해 웃고 넘어갔지만,
그건 무척 무서운 말이었다.

내가 싫어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


그 사람은 나에게 거울 같은 존재였다.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그런 일들을
당연한 듯이 받아왔던
나라는 존재는

괴물처럼 보였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너 같은 삶을 바라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네가 그렇게 태어난 건
비극이 아니야.

축복 같은 거라고.“


어떤 사람은 나에게 그렇게도
말해주었다.


“축복받은 삶 같은 건 없어.
어디서든, 살아가는 건 괴로운 일이지.

생이라는 건 말이야.
참으로 이상해서

배가 고프지 않으면
다른 곳이 고파와.


그리고 그런 결핍은
밥을 먹는 그런 단순한 행위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아.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배가 고픈 사람들은
한 끼를 배부르게 먹고 나면

그래도 잠을 잘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도 채울 수 없는 사람들은
하루도 편하게 잠들 수 없게 되어버리지.



완벽한 삶은 없어.
아픔 없는 삶도 없고.

살아있는 동안엔
어디서든 아픔을 찾게 마련이야.
삶이라는 게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굴러가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야.



나는 무식해서
유치한 비유밖에
할 수 없지만,

컵에 담긴 물은 썩어가게 되어 있어.

방부제를 넣고
소독약을 넣고
그러지 않는다면 말이야.


물은,
땅으로 스며들고,
대기로 증발하고
구름으로 응결되어
다시 물이 되어야 해.

그게 물의 운명이지.


그리고 어떤 생이든
크게 다를 바는 없어.

그렇게 아픔 속에서 순환되지 않고서는
인위적이고 기분 나쁜 향기를 풍기게 되거나
썩어져서 다른 생들에게 잡아먹히는
그런 삶을 살게 돼.“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해주었다.


처음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역시 내 곁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고
그건 결국, 나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뜻이니까.



“맞아. 말하자면 나도 너처럼 되려고
바닥에 구멍이 난 컵에 열심히 물을 붓고 있어.

내 곁엔 목마른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거든.
그들을 위해서 컵에 물을 채우고 있는 거지.

하지만 이제 몇 명 남지 않았어.
그들의 목을 축여주어야 하는 의무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사람들이 없어지면.
그런 의무가 없어지면.


“구멍이 난 컵 같은 건
쓸데도 없으니 깨버리고,

물 한 방울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말라버릴 거야.

물 같은 걸 채우는 삶은 이제 지긋지긋해.“



그가 어떤 삶을 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막에서 말라가는 삶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깨지지 않는 유리잔에
마실 수도 없는 물이 담긴
나 같은 삶을
바꿀 수 있는 건.

내 손으로
컵에 담긴 물을
쏟아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고,

그래서 그와 함께 떠나자고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진 못했고,
나 같은 사람들 곁으로 돌아와
잊고 있었지만,

소독약 냄새가 나는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서야
그때 그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함께 수영하는 친구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준비했었던 짐 가방을 꺼냈다.


몰래 떠나면서
바퀴를 끌고 다닐 수는 없어
조금 큰 손가방에 짐을 준비해두었었다.

준비해둔 돈을 가져가려다,
거기서도 시큼한 소독약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주변사람들에게 써두었던 편지도
찢어서 가방에 넣었다.

인형들을 버리면서
인형들에게 하나하나
작별의 인사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처럼
내 컵에 담긴 물을
마시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을 테니
물을 쏟아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다시 전화해볼까 했지만,

그 사람이 정한 날짜에서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고

거울 같은 걸 보고 있을 시간도 없었으므로

전화는 그만두기로 했다.

전화기는 초기화해서
편지를 두었던 서랍에 넣어 두었다.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들고 걸어서 집을 나왔다.

이 문을 내 발로 걸어 나온 적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번 차를 타고
바퀴를 굴리며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문을 나와서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운전석에서는,
조수석에서는,
뒷자리에서는 잘 보이던 길이었는데

내비게이션이 없어서였을까.


하지만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걸어가다 보면
지금 이 골목보다는
큰 길이 나올 것이고

거기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가 있을 테니

그때 다시 갈 곳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금 두려웠지만

이내 목이 말라왔고,

불확실한 내일보다,
한 푼도 없는 내가,

어디서 물을 마실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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