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두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 street fic





그녀는 나에게
내 이름이 적힌 비행기 표를
두 장 건넸다.

출발 시간은 내일 아침,
돌아오는 시간은 다음날 새벽.

무박 2일의 일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왜 이런 걸 나에게 주냐고 물었다.
이런 건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과
가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 사람과는 헤어졌어.”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 했다.

“그 뒤로 다른 사람을 만났고 또 헤어졌지.
네가 지금 누구를 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녀는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함께였던 적이 없지만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던 건
그녀의 그런 성격이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사랑하는 사람이랑은 많이 돌아다녀 봤으니까.
이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랑 다녀보고 싶어서.“

그녀는 나에게 비행기 표를 건네는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라고 말했다.


실연의 상처를 달래려
이러는 건 아닐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려는
그런 다짐 같은 것도 아닐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아름답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삶을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무언가에 얽매일 필요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본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생각한 그대로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럴만한 외모도,
그럴만한 재력도,
그럴만한 능력도 모두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 앞에서 화장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충 아무거나 걸치고 나온 추레한 모습으로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비행기 표를 건네면서
함께 먼 곳으로 가자고 하는 일은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속물 같고 편견 같은 생각이겠지만,
돈이 많아서 좋은 점은
그가 처한 문제를 다른 상황과 연결 짓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녀의 이런 행동이
다른 더 큰 문제로 인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집에 다시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가 말한 그 집은
골목에 있는 작은 음식점이었다.

몇 명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짧은 출장을 떠났었고,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나눠줄 선물을
우리에게 부탁했다.

사야하는 선물의 목록은 많았고
그것을 다 찾을 수도 없어서
나는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 지 걱정했지만,

그녀는 없는 물건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것 아니냐며,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중간중간 자신이 필요한 물건들도 사면서
마치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골목의 옷가게에서 옷을 고르던 그녀는
마침 저녁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 옆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가자고 했었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양손에 짐이 많았고 더 걷기도 힘들어
나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이른 시간이었는지,
음식점은 아직 저녁 장사를 하기 전이었고
주문을 하려면 40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배가 그렇게 고픈 것도 아니었고
쉬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했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것인지,
그녀는 음식점 안에서 기다려도 되겠냐고 물었고

주인은 흔쾌히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다.


주인은 우리에게 물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맥주를 줄 수 있냐고 해서
병맥주 하나를 시켰다.


우리는 40분 동안
창가 테이블에 앉아
말없이 사온 물건들을 살펴봤다.

나는 선물들을 꺼내 부탁한 사람별로 나누어
다시 봉투에 옮겨 담았고
산 것들의 목록과
사지 못한 것들의 목록을 정리했다.

그동안 그녀는 내 앞에서
자신이 산 물건들을 꺼내 사진을 찍고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내고
그러다가 조금 웃고

그것마저 끝냈을 땐
말없이 그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골목의 끝에 있는 음식점이라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도 않고

길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마치 벽에 걸린 그림을 보듯 한참을 바라봤다.

우리는 함께 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래서 이런 공간에서 단 둘이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창문을 보다가
내 맥주를 조금 뺏어 마시다가
또 창문을 보다가
그러기를 반복했고,

나는 음식점 안을,
영업을 준비하는 주인을
음악이 흘러나오는 낡은 스피커를
아무런 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시킨 메뉴를 조금 덜어 먹었고
빚진 걸 갚는 것처럼 자신의 메뉴도 조금 덜어주었다.

그런 행동들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했었다.


그런 분위기가 불편할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 그녀 앞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피곤했을 뿐이었는지,

돌아가서 듣게 될
높은 사람들의 핀잔이 더 걱정되었는지,

말이 없던 그 순간은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았다.


각자 메뉴에 대한 값을 치르고
음식점을 나와 숙소로 돌아간 것이

그 기억의 전부였다.


그런 곳에 그녀는 다시 가보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다.


“맞아. 그때는 너무 더웠고,
거지같은 선물을 산다고 짜증났고,
밖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음식점은 지저분했고
음식은 더 맛이 없었고,
기분대로 샀던 물건들은 처박아 두고서 꺼내보지도 않았고
말을 하고 싶은 기분도,
네가 말을 하고 싶은 사람도 아니어서
말없이 그냥 있었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떠들고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자꾸 그때가 생각나는 거야.

사고 싶었던 걸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들어가고 싶은 곳에 허락 없이 들어가고
내가 고른 곳이 누군가의 맘에 드는지 눈치 보지도 않고
상대가 싫어하는지 아닌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맛 없는 걸 먹었다는 불평을 하거나 듣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기분을 풀어주려
내가 기분이 좋아지려, 허튼 소리도 하지 않았던 그때가 말이야.
그리고 나를 짜증나게 하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알게 되었어.

그곳에서 말 없던 두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는 걸.

그래서 다시 가보고 싶은 거야.
정말 그게 행복이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나는 그녀의 결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멋대로인 성격을 가진 그녀라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시 그녀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녀 말대로 그곳에 가는 게 필요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 내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건 혼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아. 네가 가지 않아도 나는 혼자서 그곳에 갈 거야.

단지 모든 실험에는 정확한 조건이 필요하니까.
사랑하지도 않고
말도 건네기 싫은 사람이 앞에 있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한 거야.“

나는 그 말마저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표를 받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돈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 표를 받았을 것이다.

또 속물 같고 비뚤어진 나의 편견이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이.
가진 것을 쏟아 부어 내린 방법에는

함께 해줄 수밖에 없다.

그건 이미 그 자체로 절박한 순간이었으니까.

그것이 유효하든 그렇지 않든
그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이미 나아지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녀에겐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혼자서든, 나아닌 다른 사람이든

그녀는 그녀에게 맞는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거기에서 누군가의 비행기 표는
매우 사소한 일부분일 뿐이었다.

어쩌면 내가 없어야
더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녀의 말에 반박하자면
실험에는 적절한 변인을 두어야
올바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적절한 변인은 아니겠지만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말을 나누기도 싫은 사람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을 테니까.



그 음식점은 이미 없어졌다.

얼마 전 친구들과 그곳으로 여행을 다녀왔고
우연히 행선지가 겹쳐 그 골목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녀와의 기억이 떠오른 것보다
익숙한 골목의 기억이 먼저 떠올랐고

선물을 구하지 못해 걱정하던 기억과
나에게는 나름대로 맛있었던 음식의 기억이 떠올라
그 음식점을 밖에서 둘러보았는데

이전과는 다른 간판과, 다른 인테리어와
다른 메뉴를 써 놓은 음식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에게 그 말을 해줄까 했지만,
그곳으로 가려는 그녀에게
반드시 그 음식점이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곳에서
그녀가 무엇을 사든,
무엇을 고르든,
무엇을 먹든 상관하지 않는
낯선 누군가를 만나

상대를 기쁘게 하거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말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고

각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주고받는
행복한 두 시간을 보내고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니,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녀와 헤어지면서
그녀가 그곳에서 해답을 찾아오길 바랐다.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리고 그녀에게 무엇도 되고 싶지 않은 내가

잠시 동료였던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덧글

  • 2018/02/19 04:5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2/19 12:5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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