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있을 곳은 backup






얼마 전,
그녀가 오늘 만나자고 말했지만

나는 오늘 그녀가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약속을 말했을 때는
이별을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나는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도,
약속을 받아들일 준비도
모두 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이별대신
약속을 택했다.



나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잘 알지 못했다.

혼자인 시간이 길었고
사랑 없이 지낸 시간이 길었기에

사랑이 오는 순간을,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잘 알아채지 못했다.

그건 지금 그녀와도 마찬가지였고.


그녀의 많은 신호를 받고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던 나는

그녀와의 물리적인 접촉을 통해서야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은
잘 알아챌 수 있었다.

혼자인 시간이 길었고
사랑 없이 지낸 시간이 길었기에

혼자가 되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었고


이별의 말 대신 택했던
그녀의 약속을 듣고서

혼자가 되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나가
그 근처를 걸었다.

우리가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아니, 그 전부터

우리는 이 골목을 자주 걸었다.



조용하고,
가끔씩 예상하지 못한 카페들이 나오는 이 골목을

우리는 무척 좋아했다.



그때는
그녀와 함께 걸어
좋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걸어도
이 골목은 좋았다.


골목을 걸으며 느끼는
기분 좋은 이 감정은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녀와 함께 걸었기 때문에
혼자서도 좋은 것일까.

처음부터 혼자 이 골목을 찾아왔어도
좋을 수 있었을까.

나는 그녀를 좋아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골목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을까.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나는 골목을 걸으며
그녀와 쌓았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는데,

좋았던 모든 것들의 선후관계를
명확하게 단정할 수 없었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도
그녀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아마 이것이 그녀가 선택한
이별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우스운 건
내가 만났던 다른 사람들도
대개는 이런 식으로
이별을 통보했다는 것이었다.



사랑을 시작할 때에도
잘 알아듣지 못했으니

이별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그녀는 나를 만나면서
변변하지 못한 나에게 많은 실망을 했겠지만,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그녀에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했다.



약속장소였던 카페는
문이 닫혀 있었다.

며칠간 휴가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있었다.

이 카페는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그녀가 이걸 알고서
이곳을 약속장소로 잡았던 건지.

말하지 않았던 이별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려 했던 건지.

어쩌면 이 카페의 주인과 함께
휴가를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근처 편의점에서
얼음 컵에 담긴 커피를 사들고

문 닫힌 카페 앞에 아무렇게나 앉아
커피를 마셨다.


나는 이 카페의 테라스가 무척 맘에 들었다.

날이 좋을 때면
테라스에 앉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골목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비로소 나는
이 세상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날벌레처럼
하릴없이 이리저리 어슬렁대는 고양이처럼

그들과 함께
이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의자도 없는 테라스에 혼자 앉아
얼음이 있어도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지금도

똑같았다.


내일은 다시 내가 몸담고 있는 어딘가에서
내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해 헤매게 될 것이고,

헤어진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당한 거리를 찾아야 하겠지만


지금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 확실했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나의 연락 없음이
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화를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확실히 있을 곳을 알고 있는 나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나는 혼자 테라스에 앉아
남은 커피를 마시며
이 기분 좋은 소속감을 마음껏 즐겼다.


아마 그녀와 함께였다면
이 무더운 날씨에
이렇게 테라스에 앉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한 채로

차가운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서로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뿐이었을 것이다.